아무도 그 자리에 서지 않습니다
이 시리즈 · 눈이 하는 일, 머리가 하는 일 · 3화 (전체 3화) 연재중
"나누어 보기 전에는 안 보이던 것이 있습니다"
- 1화 눈이 속습니다
- 2화 맞을 수가 없습니다
- 3화 아무도 그 자리에 서지 않습니다
도면과 원근법
정면에서 그립니다
목수는 문을 정면에서 그립니다. 입면이라고 부르는 그림인데, 살 하나하나가 실제 치수 그대로 들어갑니다. 편합니다. 재기도 좋고 나누기도 좋고, 남에게 넘기기도 좋습니다. 그런데 그 그림이 보여주는 자리에 서는 사람은 없습니다. 정면 입면은 문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데서, 한쪽 눈으로, 꼼짝 않고 본 그림입니다. 그래야 살들이 전부 같은 크기로 나란히 서 줍니다. 집 안에는 그런 자리가 없습니다. 그런 눈도 없습니다.
원근법도 그렇습니다
원근법은 정직해 보입니다. 멀면 작게, 가까우면 크게 그리니 눈에 보이는 대로 옮긴 것 같습니다.
원근법이 전제하는 것은 눈 하나입니다. 한 자리에 고정된 눈 하나. 사람은 눈이 둘이고, 앉았다 섰다 하고, 걸어 다닙니다. 원근법으로 그린 그림이 맞아떨어지는 자리도 딱 한 군데뿐이고, 거기서 한 걸음만 비켜서면 어긋납니다.
그러니 원근법을 거짓말이라고 하면 조금 지나칩니다. 정확히 말하면 버리고 그린 그림입니다. 두 눈을 버리고, 움직임을 버리고, 시간을 버립니다. 버린 만큼 종이 위에서 깔끔해지는 것이죠.
한 자리에서만 맞습니다
그 극단이 로마에 있습니다. 산티냐치오 성당 천장화입니다.
포초는 천장이 뚫려 있고 그 위로 건축이 솟아오른 것처럼 그렸습니다. 칠한 면이 면으로 보이지 않게 하는 데 너무 능했습니다. 바닥에 표시된 자리에 서면 정말 그렇게 보입니다. 거기서 몇 걸음만 벗어나면 무너집니다. 기둥이 휘고 건물이 쏟아집니다.
포초 자신이 써 두었습니다. 원근법은 진실을 위조하는 일이니, 정해진 한 지점에서만 진짜로 보이면 그만이라고.
바닥에 표시까지 해두었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거기 서지 않습니다. 걸어 다니면서 봅니다.
버린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두 눈과 움직임과 시간을 버렸다고 했습니다. 하나 더 있습니다.
짜 놓은 문을 벽에 기대 세워두고 봅니다. 한 발 물러서서 봅니다.
가만히 보는 것 같지만 아닙니다. 눈은 울거미를 훑다가 격자로 갔다가 궁창으로 내려갑니다. 한자리에 머무는 법이 없습니다. 또렷하게 보이는 범위가 아주 좁아서 그렇습니다. 옮기지 않으면 나머지는 흐릿합니다.
작년에 나온 연구에 이런 실험이 있습니다.
참가자 여섯 사람에게 그림을 보여줍니다. 시선이 구석으로 옮겨가는 그 짧은 사이에, 구석의 그림을 슬쩍 바꿉니다. 알아챈 사람이 거의 없었습니다.
실험이 끝나고 두 장을 나란히 보여주며 물었습니다. 이 중에 본 적 있는 그림은 어느 쪽입니까.
한 장은 매번 보여준 원본입니다. 다른 한 장은 한 번도 보여준 적 없는 그림입니다. 참가자가 눈길을 준 조각들을 이어 붙여 만든 것입니다.
여섯이 모두 이어 붙인 쪽을 골랐습니다. 매번 보여준 원본은 다섯이 본 적 없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한 장면이라고 부르는 것이 이렇습니다. 눈이 훑어 모은 조각을 이어 붙인 것입니다. 이어 붙인 자리는 보이지 않습니다.
원근법은 눈이 하는 일도, 머리가 하는 일도 그리지 않습니다. 한 점에서 뻗은 선을 화면에 받아 적는 규칙일 뿐입니다. 사람이 보는 방식이 아닙니다. 수학이 그린 것입니다.
무엇을 버린 그림인지 모르면, 종이에서 맞고 자리에서 틀립니다. 만드는 사람이 이걸 알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문은 그림이 아닙니다
그림은 어디서 보든 같은 그림입니다. 문은 어디서 보든 다른 문입니다.
비스듬히 서면 살의 옆면이 보입니다. 그림자의 길이가 달라집니다. 걸어가면 무늬가 따라 바뀝니다. 문은 매번 다시 그려집니다.
그러니 도면에 없는 것이 문에서는 일을 합니다.
버려지는 것 중에 두께가 있습니다
정면에서 보면 살 두께가 안 보입니다. 도면에도 없습니다. 살 폭은 그림에 그대로 나오지만, 두께는 나올 자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보는 사람 눈에는 두께가 보입니다. 같은 폭이라도 얇게 짠 살은 가늘고 약해 보이고, 두껍게 짠 살은 실해 보입니다. 보이는 것만도 아닙니다. 빛은 정면으로 오는 법이 없습니다. 해가 창을 정면으로 마주 보려면 지평선에 걸려 있어야 하는데, 이 땅에서 그런 빛은 없습니다. 늘 위에서 비스듬히 듭니다.
비스듬히 드니 살의 두께가 걸립니다. 두께가 빛이 들어오는 양을 정하고, 그림자의 길이를 정합니다. 얇으면 빛이 많이 들고 그림자가 짧게 떨어집니다. 두꺼우면 반대입니다. 살 두께가 그림자의 양을 정하고, 그림자의 양이 문의 양감을 정합니다. 같은 살 나누기로 짠 문이 두께에 따라 다른 문이 됩니다. 그리고 얼마가 알맞은지는 또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문이 크면 달라지고, 살 폭이 달라지면 또 달라집니다. 앞 편에서 칸 비율을 두고 드린 말씀과 같습니다. 정면 그림에는 그 판단이 하나도 남지 않습니다.
종이에는 무늬가 하나 더 있습니다
파티션을 하나 짰습니다. 세 폭짜리, 정자살에 한지를 발랐습니다. 살은 25밀리로 잡았습니다. 파티션은 문틀에 매달리는 물건이 아니라 혼자 서야 하니 살이 굵어집니다.
마당에 펴 세워두고 보니 종이에 격자가 두 겹입니다. 살이 한 겹, 살 그림자가 한 겹. 그림자가 살 자리에 있지 않고 옆으로 비켜 앉았습니다.

종이는 살 한쪽 면에 바릅니다. 살과 종이 사이에 두께만큼 거리가 있다는 뜻입니다. 해가 비스듬히 드니 그림자가 그 거리만큼 밀려서 종이에 맺힙니다. 두꺼울수록 멀리 밀립니다. 얇으면 살 뒤에 겹쳐서 보이지 않습니다.
세 폭이 각각 다른 각도로 서 있습니다. 그러니 한 물건에 세 개의 무늬가 동시에 있습니다. 살 나누기는 셋 다 똑같습니다.
창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다만 잘 안 보입니다. 방으로 드는 빛은 대개 흩어진 빛이라 그림자가 흐리고, 창은 한 방향으로만 서 있으니 무늬도 하나뿐입니다. 아침저녁으로 해가 낮게 들 때는 이 두 겹이 창에도 그대로 나타납니다.
도면에서 살은 한 겹입니다. 두께가 없으니 그림자도 없습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무늬가 하나 더 생기고, 그 무늬는 해를 따라 하루 종일 자리를 옮깁니다. 저녁이면 사라집니다.
창은 어디서 보입니까
문은 정면에서 보라고 달아놓는 물건이 아닙니다.
마루에 앉으면 눈높이가 내려갑니다. 방에 들어서면 비스듬히 봅니다. 지나가면서 보면 살 간격이 스칩니다. 빛이 뒤에서 들어오면 살은 검은 선이 되고, 앞에서 들면 그림자가 따로 생깁니다. 같은 문인데 다 다르게 보입니다.
목수는 아무도 서지 않는 자리에서 그려서, 실제로 사람이 서는 자리들에 내놓습니다.
그 사이를 건너는 일이 남습니다. 자로는 안 되는 쪽입니다.
그리는 자리와 보이는 자리가 다르다는 것을 알고 그리는 것, 그것까지가 그리는 일입니다.
살 두께를 정할 때 재는 것은 굵기만이 아닙니다. 그 두께가 종이에 얹을 그림자까지 같이 정합니다.
아직 생기지도 않은 그림자를 보고 치수를 잡는 셈입니다. 자에는 그런 눈금이 없습니다.
이것도 안목입니다.
출처
- M. H. Pirenne, Optics, Painting and Photography,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70.
- D. Vishwanath, A. R. Girshick, M. S. Banks, "Why pictures look right when viewed from the wrong place," Nature Neuroscience 8 (2005), 1401–1410.
- D. Martin, D. Gutierrez, B. Masia, S. DiVerdi, A. Hertzmann, "Viewers perceive shape in pictures according to per-fixation perspective," Scientific Reports 15 (2025), 15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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